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마즈 요시히로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참전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히데요시의 1만 5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하지만 위 문단에 적힌, 당시 시마즈의 복잡한 상황을 감안해 조선에 넘어간 것도 상당히 늦게 갔고 병력도 [[사쓰마]], [[휴가]], [[오오스미]] 삼국을 거느리는 강대 다이묘치고는 적은 병력을 이끌고 갔으며, 당시 일본 원정군의 거의 전부가 한꺼번에 동원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10일간의 혈투 끝에 성을 함락시킨다. 1597년 7월에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수군과 제휴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격파했다. 8월에 [[남원 전투]]에 참가하고 [[부여군|부여]]까지 북상했다가 [[정읍시|정읍]]을 지나 [[해남군|해남]]에 남하했다. 10월 말부터 [[사천시|사천]]을 수비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왜성|울산]](현재의 학성 터)에서 농성하며 처절한 모습을 보일 적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1598년 9월에 [[사천성 전투|사천에서 명군을 대파]]했다. 시마즈군이 약 7천에서 1만여 이하, 명군 및 조선군이 29,015명이었다. 당시 시마즈군의 보고서에서는 '''20만'''으로 기록되었던 듯하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 보고에 의하면 명군은 약 7천여 명의 전사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조선과 명으로서는 대패요, 일본측으로서는 대승이었던 바,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도 '전대미문의 대승리'라 평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마즈 요시히로 측에서도 엄청난 손해를 본다. 가장 큰 손실이라면 사천성 전투 전후에서 사랑하는 후계자이자 차남 [[시마즈 히사야스]]가 [[거제도]]에서 '''병사'''한다.[* 첫째 아들은 어릴 때 병사했다.] 사천성 전투 및 이후 조선에서의 요시히로의 엄청난 분전은 아무래도 이 영향도 있을 듯하다. 덕분에 삼남이었던 [[시마즈 타다츠네]]가 카메쥬히메와 결혼하며 최종적으로 시마즈 가문의 당주가 된다. 어쨌든 이 공로로 [[명나라]]에서 '''귀석만자(鬼石曼子)'''[* '''석만자'''의 발음이 '''시만쯔'''로, 당대 [[일본어]]가 '나베'(鍋)를 '남비'처럼 들리게 유성음을 비음화한 것을 감안하면 '즈'가 비음화 된 '시마즈'과 상당히 유사하다.]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석만자라는 같은 [[시마즈]] 지역의 왜장이 사로잡힌 일이 있었는데 이후 요시히로 즉, 의홍과 동일 인물인가 하는 질문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기도 한다. [[명사(역사책)|명사]]에서도 석만자(石曼子)란 왜장이 등장하지만 이쪽은 진린에게 패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귀석만자'(鬼石曼子)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도 일본, 그것도 시마즈 가문 기록 정도고, 명과 조선에서는 그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영조 때 [[조엄]]과 함께 1763년 [[조선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원중거는 일본 측 사료와 조선의 사료를 비교 정리하여 자신의 저서 화국지(和國志)를 펴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기록을 보고 귀석만자(鬼石曼子)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일본]]의 귀신 이름인가?"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조선측 기록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자주 나타나는 무장이다. 흔히 한자 이름 '도진의홍'이나 '심안돈(沈安頓)' 또는 심안돈오(沈安頓吾)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일종의 존칭인 '도노(殿)'를 성에 붙인 '시마즈 도노(島津殿)'를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가고시마 사투리로 '도노'를 '돈'이라고 하는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표준어로는 '시마즈도노'이지만, 가고시마 사투리로는 '시마즈돈'이라고 한다. 비슷한 예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가고시마 출신)의 경우, 가고시마에서는 '사이고돈', '세고동'이라고 불린다. 1598년 11월, [[노량 해전]]에선 [[고니시 유키나가]]를 탈출시키기 위해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과 합세해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과 전투를 벌였다. 시마즈는 개전 초기 반포위에 걸려든 시점에도 기민하게 움직여 조명 연합수군의 약점인 진린 방향을 맹렬하게 물어뜯었으나 진린 함대가 뚫리기 전 이순신의 본함대에게 먼저 후미가 쪼개지면서 패전한다. 이후 퇴로를 찾다가 관음포에 갇히고, 수차례 탈출 시도를 하다가 어떻게든 탈출에 성공했으나 대부분의 함대가 수장된다. 결국 요시히로는 목숨만 건진 채로 고국에 돌아간다.[* 일본 영주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무사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영주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무사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고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다.] 이 때의 피해에 대한 얘기는 [[노량 해전]]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비록 전투에서 패해 전력을 전부 잃었지만 시마즈가 조선 수군을 공격함으로써 해상봉쇄가 일시적으로 풀렸고 덕분에 일본군의 퇴로가 열렸다는 점이 인정되어 전후 봉록을 받았다. 또한 '난중잡록' 등에 의하면 이순신을 저격하여 전사시킨 조총병 부대가 시마즈 부대라는 설이 유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